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도 일본어설 (문단 편집) ==== [[고고학]]계의 검증 ==== 반도 일본어설의 찬성론파 측에서 입론의 근거로서 이와 같은 물질 문화의 변화상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나, [[고고학]]계에서는 이러한 물질 문화의 변화를 토대로 언어와 같은 관념 문화, 그리고 실제의 혈통 변화를 해석하는 데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 고고학계에서는 앞서 제시된 휘트먼의 가설과는 달리, 기원전 5-4세기 이후 점토대토기문화의 확산을 단순한 이주나 주민교체설의 견지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고고학계는 이를 비교적 소규모의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활발한 교류 및 융화의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전기 청동기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요동지역 청동기 문화 네트워크 사이의 교류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송만영, 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 / 김현식, 남한 청동기시대 원형점토대토기문화 출현의 정치·사회적 의미, 2023] 특히 알렉산더 보빈이 제시하는 '[[한국어족|무기와 전술이 우월한 북방의 기마민족 내지 수렵민]]이 [[일본어족|남방의 농경민족]]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식의 자극적인 주장[* 보빈은 기병을 가진 북방의 한국어족이 남방의 일본어족을 정복하고 예속시켰다고 추측하지만(From Koguryo to T'amna, 2013), 일반적으로 한반도에서 기마 내지 차마 문화와 연결지을 수 있는 흔적은 낙랑군 설치 이전 시점으로 소급되지는 않는다고 본다.(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2000 / 손로, 고대 동북아시아 차마구와 기마구의 변천, 2012) 마찬가지로 보빈이 한국어족의 남하 시점으로 처음 지목한 3-4세기 무렵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지역에 기마문화가 출현하는 현상 역시 고고학계에서는 기마민족의 남하와 같은 극적인 인구이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토착민의 능동적인 대외교류의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강봉원, 신라 적석목곽분 출현과 기마민족 이동의 상관관계에 대한 재검토, 2013)]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상호 간의 호혜적인 교류 속에 점진적으로 통합되어갔음을 시사하고 있다.[* (김승옥, 만경강 유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전개과정과 특징, 2016) 이 때 김승옥은 만경강유역에서는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이 송국리 문화 집단에 비해 사회의 주도권을 가졌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호남 일부지역에는 점토대토기 문화의 최말기까지 송국리 문화가 잔존하여 이러한 방식의 통합이 모든 지역에서 일률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리라 보고 있다.] 한편 강원 지역에서는 점토대토기 문화가 기원전 4세기부터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는 종래의 [[민무늬 토기]]와 병존하다가 새로운 철기문화로 모두 흡수되기 때문에 딱히 점토대토기 문화가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이숙임, 강원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 고찰, 2007] 이 지역에서 [[한국어족]]이 정착한 과정은 단순히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의 이주 이외의 다른 부가적인 요인을 통해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상기한 논의는 [[민무늬 토기]]와 점토대토기와 같은 몇 가지 표지 유물만을 가지고 어족과 집단의 이주를 단순화해서 이해하는 반도 일본어 가설의 입장과,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이주 뿐만 아니라 교류 및 전파, 융합과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주류 [[고고학]]적인 견해들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물론 물질 문화의 변화 양상을 통해 해석된 상기의 논의들이 관념 문화의 변화까지 온전히 포괄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극단적인 수준의 대규모 주민 교체는 없었을지언정 비교적 소규모 수준의 [[고조선]] 계통 주민들의 집단적 이주는 어느정도 존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 이들이 지역적인 교역망을 주도함에 따라 이들의 언어인 [[한국어족]]이 점차 지배적인 언어로 부상했을 가능성 역시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반도 중남부에서 [[청동기 시대]] 말기에서 [[원삼국 시대]] 사이에 어떤 집단이 대규모로 이동했다고 상정할 수 있을 만큼의 극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 무렵의 고고학 자료들을, 외래인의 대규모 이주로 말미암아 어족이 비교적 단시간에 극적으로 변했다는 반도 일본어 가설을 결정적으로 확증할만한 근거로 사용하기는 어려워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반도 일본어설의 찬성론자들이 이 무렵의 [[일본어족]] 집단으로 가정하는 한반도 중남부 토착민들은 단순히 이러한 외래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이들에 흡수되는 입장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다른 집단과 교섭하면서 토착문화와 외래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킨 주역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문안식, 요하 문명과 예맥, 2012] 즉 일본어족 토착민이 일부 기층 어휘만을 남기고 외래의 한국어족 집단에 흡수 및 소멸한 것으로 가정하는 반도 일본어설의 기존 주장과는 다소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물론 조진선, 주보돈 등 이 시기의 비교적 문헌기록을 신뢰하는 연구자들은 이 당시 진-변한 사회에서 유이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의 관점은 반도 일본어 가설과 어느정도 통할 여지는 있다.] 이와 같은 고고자료의 양상은, 외래 한국어족에 의한 토착 일본어족 집단의 대체라고 하는 반도 일본어 가설에 부분적으로 개연성을 제공할 여지는 있으나, 이러한 자료를 반대되는 가설[* 예컨대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한국어족이 한반도 중남부에 널리 자리잡았다는 입장]을 배척하는 논리로 이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또한 고고자료 상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을 한국어족으로, 토착민을 일본어족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고고학적 해석을 통해서는 도출하기 어려운 많은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반도 일본어족 가설의 주장대로라면, 당시 중국 동북지역 및 한반도 중, 북부에 있던 수렵민 성향이 강한 '한국어족' 계통의 주민집단과, 한반도 중남부 농경민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어족' 계통의 주민집단이 적어도 특정 시점에는 서로 어족 수준의 언어의 차이가 분명히 나타날만큼 이질적인 집단으로서 병존해야만 한다.[* 알렉산더 보빈은 한국어족을 기마술을 가진 정복자로, 일본어족을 보병 중심의 농경민족으로 대별하였다.(From Koguryo to T'amna, 2013), 앞선 각주에서 언급했듯이 일단 어느 시점에건 기마민족이 대대적으로 한반도로 남하했다는 가설은 고고학적으로는 아무 근거가 없다.] 물론 물질 문화의 양상이 언어, 어족과 같은 관념문화를 온전히 반영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고고학적 사료를 통해서는 물질 문화 집단을 확연하게 두 개의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별할 만한 실마리는 그다지 나타나 있지 않다. 예를 들면 기원전후부터 다양한 문화권이 병존하는 요서-요동-서북한-압록강-두만강 유역의 광대한 영역의 문화집단들은 이들을 단일한 '북방세력' 내지 '북방문화'로 단순화할 수 있을만큼 동질적이지도 않았다. 예컨대 [[부여]]계 문화를 대표하는 서단산문화나 [[고구려]] 계통 문화도 유사한 점이 있으면서도 묘제나 여타 문화요소가 분명히 차이가 나며, 이들은 다시 [[원삼국 시대]] 이후 강원지역의 예계 문화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도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흔히 후대의 문헌기록을 과도하게 소급 적용하여 이들을 '예맥계 종족'이라고 단순화하는 경향도 분명히 학계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상 이들은 삼국시대 이전에 어떤 통일된 종족집단이나 물질문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영찬, 예맥의 종족성과 물질문화, 2023] 또한 북방 문화는 반대로 한반도 중남부의 청동기 문화 집단과 아주 격절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들은 같은 요령식 비파형 동검 문화권에 속해 오히려 긴밀히 교류하는 관계였다는 점도 분명히 주지해야 한다. 오히려 송국리 문화가 확산된 한반도 중서부 일대는 해로를 통해 서북한 및 요동집단과 밀접하게 교류했던 경향 역시 존재한다.[* 강인욱, 초기 고조선 네트워크의 형성과 비파형동검문화, 2018/ 이후석, 요동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체계와 사회, 2020][* 반면 반도 일본어설에서 이 당시 민무늬 토기 집단과 같은 일본어족이라고 가정하는 야요이 문화권에서는 정작 비파형 동검이 나타나지 않으며, 점토대토기 문화가 한반도 중남부에 나타난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점토대토기 및 세형 동검이 규슈 지역으로 확산된다. 특히 최근에는 야요이 문화의 상한이 한반도 청동기시대 중-후기인 기원전 8-7세기까지로 상당 부분 올라갔는데도, 딱히 야요이 문화가 비파형 동검 문화권과 연루된 정황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청동기 시대 조기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중남부는 이미 이러한 다양한 계통의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고 수용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청동기 시대 조기-전기부터 다양한 문화 조합상이 한반도 중남부에 나타났다.[* 천선행, 청동기시대 조기설정 재고, 2015 / 청동기시대 조기문화 성립과 지역 간 관계변화, 2019] 이후 청동기 시대 중기 혹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문화권이 생업양상별로 통합되어, 대략 울산-경기 중부를 가르는 축선으로 [[송국리문화]]권과 비송국리 문화권이 구별될만큼 한반도 민무늬 토기 문화권도 역시 그다지 동질적이지 않았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비송국리 문화권이라고 해서 점토대토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고, 이들은 오히려 원삼국 시대 개막 직전까지 오랫동안 민무늬토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점토대토기는 해로를 통해 송국리 문화의 중심지인 한반도 중서부일대에 처음 유입, 확산된 것으로 본다.(박순발, 요령 점토대토기문화의 한반도 정착 과정, 2004 / 송종열, 만경강유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정착 과정, 2015 등)] 물론 이들 역시 서로 간의 무조건적인 긴장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경주, 부산 등 동남부 일대에는 이들 사이의 점이지대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야요이 문화의 초기 기원 중 하나로 지목되는 곳이 이 지역으로, 송국리 문화를 일부 수용했으나 청동기 시대 전기 이래의 잔존 요소가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초기 야요이 유적에서도 마찬가지로 송국리 문화에서는 이미 소멸된 각목돌대문토기나 공렬문토기 등이 나타나고 있어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의 양상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홍종, 송국리문화의 시공적 전개, 2003 / 이홍종은 이 때문에 이 당시 야요이 문화의 기원이 되는 세력은 한반도 내부의 열세 집단으로서, 여러 내외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 외래의 송국리 문화의 문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본다.] 사실 송국리 문화는 야요이 문화와 상당한 접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하기는 어렵고 기존에 존재하던 송국리 문화와 조몬 문화가 상당한 변형 및 융합을 거쳐[* 재지적 특징이 강한 변형된 송국리 문화의 이주, 토착 [[조몬인]]들에 의한 선별적 문화수용 및 이들 양자의 결합 등] 형성된 제 3의 문화로서 야요이문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정은, 규슈지역 송국리문화의 확산과 문화변동, 2019 / 다만 비교적 규슈 지역에서는 송국리 유형 주거지로만 이루어진 취락이라던가, 송국리형 주거지가 기존 재지 주거지보다 우월한 입지를 확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주는 결코 소규모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비교적 이주민이 재지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이 일반적이다.(유병록, 일본 구주지방 송국리문화 연구, 2010 등)] 혈연적 공통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문화요소의 공통점만을 가지고 송국리 문화로서 한반도 중남부 제집단이 범칭되고 있기는 하나[* 사실 송국리문화권에 속하는 진주대평리 유적만 하더라도 청동기시대 전기 이래의 재지의 물질문화 요소가 송국리문화와 융합하여 형성된 취락이며, 본래 송국리 문화는 직접적인 이주를 통해서만 확산된 문화가 아니다.(이종철, 송국리형 문화와 취락체제의 발전, 2015)], 단순히 이에 근거하여 한반도 중서부의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 집단과, 상당히 많은 문화적 변형을 거쳐 형성된 일본 규슈의 야요이 문화 집단을 혈연적으로 동일한 계통의 집단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 수 있다. 대개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는 반도 일본어족을 주로 농경민인 송국리 문화와 동일시하고, 이들 문화가 [[태백산맥]]을 경계로 비교적 수렵채집의 생계양식이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던 [[한반도]] 중동부, 중북부 일대로 전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반도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이 서로 명확히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고고학적 양상들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으로, 강원 지역 및 울산 지역에서는 오히려 오랫동안 점토대토기보다는 민무늬토기가 우세한 반면에,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먼저 점토대토기와 세형 동검이 출현하며, 이들은 또한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한국어족]]의 기원지로 지목하는 요동지역과 긴밀한 교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각 어족에 대한 지표들로 제시하는 민무늬 토기, 세형 동검, 농경 내지 수렵 채집이라는 생계경제 양상 등은 어떤 측면에서건 고고학적으로 서로 다른 두 집단으로 명확히 분리해서 해석할 수 있을만큼 일관적인 양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한편, 앞서 언급한 휘트먼은 어족을 구별하는 지표로서 민무늬 토기와 세형 동검만을 대별하고 있을 뿐인데, 이에 따르면 민무늬 토기문화권 중에서도 [[농경]]문화 전통이 비교적 약한 검단리 문화권, 천전리 유형권 등 강원지역 및 울산-경북 북부 일대 역시 일본어족이어야 할 것이다. 해당 지역에서는 송국리 문화권과는 달리 수전농경이 널리 퍼져 있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수전농경을 일본어족의 특질로 부여하는 반도 일본어설은 이 부분에 대해 충분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위와 같은 기원전 시기 동북아시아 지역 문화유형의 복잡한 양상을 검토해보면 단순히 이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제종족들을 거대한 두 개의 집단, 즉 [[한국어족]] 집단과 [[일본어족]] 집단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지에 많은 의문부호가 달린다. 오히려 물질문화의 양상으로만 보자면 한국어족-일본어족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별법보다 훨씬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문화 양상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서로 외떨어져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또 긴밀한 교류의 관계 속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반도 일본어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렇듯 다양한 범주의 문화권을 어디에서부터 [[한국어족]]으로, 또 어디에서부터 [[일본어족]]으로 구획해야하는지, 또 그러한 구획에 어떤 정당한 근거가 있는지를 먼저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청동기 시대]]부터 [[요동]] 지역과 [[한반도]] 중서부 일대가 교류망을 이루고 이주민이 일부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 야요이 문화가 부분적으로 한반도 이주민의 기여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같은 몇 가지의 고고학적 증거만을 가지고서는 보빈류의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대로 반도 일본어족이 [[한국어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상태로 오랫동안 존재해왔고, 이들이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가설을 증명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령 일본 야요이 문화의 기원이 [[한반도]] 주민의 이주로 인해 시작되었으며, 또 그들 이주민이 원래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언어가 일본어족의 원류가 되는 언어였다고 할지라도, 그 언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지는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논증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원삼국 시대]]까지의 [[고고학]]적 양상은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일부 부합하는 측면도 있으나 차이점도 적지 않으며, 따라서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반도 일본어 가설을 논증하고자 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고 엄밀하게 고고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편, 한국 고고학 연구자 중 정규 논문을 통해 반도 일본어 가설에 대해 평가한 연구자는 김장석과 박진호가 거의 유일한데, 그들은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달리 청동기 시대 전기 당시의 한반도의 물질 문화 양상은 비교적 동질적라고 본다. 이에 따라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청동기 시대 전기 이전에 이미 분지되어 한반도 북부 및 중남부 일대에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서로 병존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한편, 청동기시대 전기 이후에 양자가 분리됐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의 차이를 감안할 때 언어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어족이 세형 동검과 함께 확산되었다는 휘트먼의 주장에 대해서는 세형 동검 계통 이주민은 비교적 소수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 Jangsuk Kim-Jinho Park, Millet vs rice: an evaluation of the farming/language dispersal hypothesis in the Korean context, 2020, 단, 이들의 연구는 반도 일본어설 자체를 전반적으로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반도 일본어설에서 가정하는 몇 가지 핵심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검토한 것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